일그러진 난세를 우아한 예술로 치환해내는 피아니스트
2010년대 한국 재즈의 현주소는 때로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의 작품들―해마다 약 70~100장―이 제작되고 있으며, 그 수준 또한 꽤 고무적일 만큼 상향 평준화됐다. 20년 전, 아니 10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 속에 많은 음악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데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연주자의 저변이 ‘너무’ 넓어진 탓이기도 하지만) 시장 상황은 더 악화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트리밍이 일반화되면서, 라이브를 최고의 가치로 지닌 재즈는 더 많은 난제를 떠안게 됐다. 나는, 바로 지금이 우리 스스로 냉정한 숨고르기에 들어가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음악인들이 재즈의 고유한 어법을 재현해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만, 최종적으로 아티스트가 지향해야 할 바는 독창성에 있다. 긴 호흡으로 보았을 때, 듣는 이들은 ‘재즈 선진국’에서 발표된 음악을 충실히 모방한 작품보다 해당 아티스트의 곡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유한 음악성을 기대한다. 나아가 그런 작품을 만든 이들이 역사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 있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편곡가인 이지연도 드디어 한국 재즈를 조망하는 자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롱런을 얘기할 수 있는 믿음직한 존재가 됐다. 두 번째 리더작 [This Place, Meaning You]가 이를 증명한다.
피아니스트 이지연이 처음 존재를 알린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2012년 봄, 네덜란드에서 녹음한 첫 앨범 [Bright Green Almost White]을 발표하며 주목할 신인으로 떠올랐는데, 이는 우리나라 음악인의 앨범 중 드물게 제작된 대편성의 음악을 담고 있었다. 많은 관계자들은 이지연의 세련된 작곡과 편곡에 큰 관심을 표했다. 다만 그 곡들을 과연 얼마나 효과적으로 무대에 올릴 수 있을지가 현실 속의 관건이었다. 더구나 프로듀싱과 녹음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매우 충실한 작업이 진행된 웰-메이드 작품이었기에 그에 따른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이지연은 첫 앨범을 발표하자마자 쉼 없이 작업을 이어갔고 이를 무대에 올렸다. 모든 곡을 큰 편성으로 연출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 자신의 곡들을 듀오, 트리오, 쿼텟, 퀸텟, 옥텟 등 다양한 편성에 새롭게 대입해냈고, 대규모 빅 밴드 공연 또한 여러 번 치러냈다. 이렇듯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동료 연주자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된 것으로 안다. 지난봄, 어느 소장파 색소포니스트는 “다른 이들은 대부분 포기한 일들을 그녀가 실행에 옮기고 있어서 연주자들은 매우 기쁘게 리허설에 임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지연 스스로 자신의 첫 앨범이 ‘음원’에 머물지 않도록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곡과 편곡은 이지연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핵심적으로, 또한 필수적으로 관찰해야 할 부분이다. 첫 앨범 때도 그러했지만 [This Place, Meaning You]를 듣는 가장 큰 기쁨은 무엇보다 인상적인 작곡이다. 두 번째는 그 주제들이 어떤 음의 조합 속에 수직적으로, 그리고 어떤 타이밍에 수평적으로 진행되는가 하는 것, 바로 편곡이다. 녹음에 참여한 라인업의 면면을 미리 확인하지 않고 듣다 보면, 이 작품의 편곡이 퀸텟이나 섹스텟에 기반을 두지 않고 마치 더 큰 빅 밴드처럼 진행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만큼 이지연의 편곡이 악보 상의 그것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아주 자연스레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아주 좋은 이 앨범의 감상법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플루트나 색소폰 등 어느 하나의 관악기를 자기 시점으로 설정한 뒤 그 소리가 다른 악기와 어떻게 교류하는지 지켜보자. 곡에 따라 이 시점을 베이스에 옮겨 두어도 좋다. 단순히 테마의 진행에 따라 누가 어떤 식으로 화성을 엮어내는지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앨범 듣기가 가능할 것이다. 함께한 연주자들이 이지연의 곡들을 다룸에 있어 매우 진지하고 충실하게 녹음에 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도 이 관찰의 과정 속에서 감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성과다. 마치 자신의 리더작을 녹음하는 것처럼, 연주자들은 시종일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동료들로 하여금 그렇듯 의미 있는 연주를 남기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은 역시 이지연의 감성으로 완성된 곡, 그 자체다. 이지연의 곡들은 매우 섬세하고 세련됐다. 일견 부드럽고 나긋나긋해 보이지만 굳건한 고집과 타협 없는 자기만의 시선이 내재된, 외유내강형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풍경, 연민, 회상, 여행, 항해, 달빛 등 이지연의 작품이 지닌 이미지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단상을 품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나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쉽지 않은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음에도 어떻게 그녀가 이런 곡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피아니스트 이지연은, 이 일그러진 난세를 우아한 예술로 치환해내는 작곡가다.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재즈 음악인들이 그러했듯, 피아니스트 이지연 또한 재즈에 입문하기 전 다른 영역에서 음악 활동을 벌인 적이 있다. 주로 영화나 TV 드라마 등, 영상 음악 분야에서 많은 곡 작업을 했는데, 생각해 보면 이런 경험이 오늘날 자신의 음악성을 완성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클래식 피아노를 학습한 것도 마찬가지. 질펀한 타건의 비밥보다 쇼팽이나 드뷔시의 음악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는 이 앨범, [This Place, Meaning You]가 풍기는 아우라와 궤를 같이 한다. 이지연의 음악이 지닌 낭만주의적 성향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가늠케 하는 근거들이랄까.
데뷔작에 비해 [This Place, Meaning You]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은 앨범 전체가 꾸준한 라이브를 기초로 완성됐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 함께 연주하고 의견을 나누는 동료들이 곁에 있었기에 이 앨범을 완성할 수 있었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피아니스트 이지연의 오늘을 얘기할 수 있게 됐다. 재즈는 디지털기기 속의 음원보다 무대 위의 호흡으로 살아 숨 쉬고 있을 때 비로소 재즈답다. 그녀를 향한 박수갈채는 자신의 음악이 더 넓은 공간 속에 오래 울려 퍼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 아티스트에게 주는, 격려와 감사의 의미를 아우른다. 다시 한 번, 이지연의 무대를 찾아 객석에 자리할 때다.
김 현 준 (재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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